기자는 정말 기레기일까?

처음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우리 가족과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 정의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거창한 욕심이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가 80년대 해직기자였고 그런 아버지의 삶을 보고 듣고 자란 영향이 컸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해 여름의 상처에서 소개했다.) 두 번째는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90년대, 당시 매일 밤 9시마다 방송되는 MBC 뉴스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뚜뚜뚜 뚜.”

파란색 텔레비전 화면 가득히 뜬 아날로그시계에 초침이 움직이다 9시 정각을 가리킨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마저 잡아끄는 요란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뉴스가 시작한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엄기영입니다. 0월 0일 뉴스데스크 시작합니다.”

나는 뉴스데스크를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보면서 정의에 대한 내 생각을 정의했다. 카메라출동은 사회 곳곳의 부조리한 현장을 생생한 화면으로 고발했고 엄기영, 정동영과 같은 스타 앵커들은 그날 주요 이슈에 대해 자신만의 철학과 언론관이 담긴 촌철살인 클로징 멘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시대 MBC 뉴스는 여야 정치인 가릴 것 없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거침없는 날 선 보도를 이어갔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상스러운 욕이 아닌 품위 있는 언어로 잘못된 관행과 불의를 예리하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기자들의 모습에 반했다. 단지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때였다.

그들처럼 세상에 정의를 알리고 싶다는 욕심에 20년 뒤 나는 기자가 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처음 이직하고 난 이후 두 번째 직장에서 조금씩 그 욕심을 해소했다.) 사회부 기자로 새벽마다 경찰서를 돌며 사건 사고 쫓기에 바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다 보면 30분이 훌쩍 넘어갔다. 차를 타고 부산의 동쪽 끝 해운대에서 서쪽 끝 서구, 사하구, 영도구로 향했다. 세 곳의 경찰서를 차례로 돌며 간밤에 벌어진 사건사고를 취재하고 6시 정각에 경찰서 전화로 캡(경찰서 출입기자를 관리 감독하는 10년 차 이상의 선배 기자)에게 첫 보고를 했다. 캡의 휴대전화에 뜨는 유선 전화번호로 내 현재 위치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디야?”

“네. 지금 영도서입니다.”

“보고해봐.”

“새벽 1시 10분쯤 영도구 영도동 2층짜리 단독주택 가정집 1층에서 불이 났습니다. 63살 주인 이 모씨가 연기에 질식해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고 재산피해는 가재도구 포함해서 600만 원 정도입니다. 화재원인은 소방서에서 아직 조사 중입니다.”

“다음.”

캡이 지시한 단신 기사를 서너 개 쓰고 대략 8시부터 9시까지 황금 같은 개인 시간이 주어졌다.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아침도 먹고 차 안에서 쪽잠도 잤다. 급하게 나오느라 씻지도 못하고 출근한 날엔 경찰서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퇴직을 앞둔 나이가 지긋하신 서장과 탕 안에 마주 앉아 민망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9시가 되면 편집부 회의에서 결정된 아이템을 전달받았다. 간부들의 편집부 회의를 통과하는 뉴스 아이템의 선정 기준은 사회적인 의미보다 자극적인 소재 여부에 따라 갈렸다. 뉴스는 시청자의 신뢰가 생명이다. 그 신뢰는 시청률이란 숫자로 평가됐다. 간부는 자신의 능력을 시청률로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생각한 가치 기준이 아니라 간부들이 좋아할 만한, 편집부 회의를 가볍게 통과할만한 아이템을 찾고 있었다.

수습생활과 사회부 초년병 시절을 거치다 보면 군대처럼 수직적인 보도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가장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지닌 젊은 인재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오늘은 덜 욕먹어야 지란 생각으로 선배들 눈치보기에 급급해진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비판하면서도 우리 사회 그 어떤 조직보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가득한 곳이 언론사였다. 사설이나 논평이면 모를까 기자 개인의 가치와 의도가 기사에 반영되기란 쉽지 않다. 편집부 회의에서 뉴스 아이템이 선정되고 일선 기자들은 데스크로부터 이른바 “총을 맞는다.” 데스크가 지시한 사안을 취재해서 기사를 써야 하는데 지시 내용에는 단순히 기사 주제뿐만 아니라 흐름과 방향까지 포함된다. 다양한 시각에서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이슈마저도 간부들이 정한 대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 데스크 지시와 다르게 쓴 기사는 데스킹 과정에서 싹 뜯어고쳐진다. 가슴속에 열정이 남아있는 기자라면 자신보다 십 년 이상 기자 생활을 더한 선배를 상대로 세게 들이박고 한바탕 토론 배틀을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의 최종 수정 작업은 데스크의 고유 권한이다. 그렇다면 차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두 욕먹을 대상인가. 그들 또한 처자식을 가진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기에 조직 내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이면서 젊고 혈기가 왕성했던 그들도 점점 수동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봤다. 나는 편집부 회의를 주재하는 보도국장(방송)과 편집국장(신문)의 의지와 역량이야말로 해당 언론사의 보도 가치와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본다. 내가 있었던 곳만 하더라도 보도국장이 바뀌면서 뉴스의 질과 보도 흐름에 큰 차이를 보였다. 광고주 같은 자본 권력과 정권의 압박 등 정치권력으로부터 후배 기자들이 마음껏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도록 얼마만큼 리더가 버텨주느냐가 관건이다.

안타깝게도 언론사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사장에 임명된 뒤 임기를 마치고 진보 정당 국회의원이 된 기자가 있었고 진보 진영을 향해 날 선 비판이 담긴 논평을 일삼던 기자가 보수 정당의 국회의원이나 청와대 대변인이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간부급 기자들이 퇴사한 직후 정치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다운 선배의 뒷모습이 아닐뿐더러 그들이 재직 시절 기자로서 또 간부로서 뉴스 제작과 보도에 어떤 가치 판단을 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독자와 시청자들은 단순히 표면적인 기사 내용만을 보고 기사에 달린 이름의 기자를 향해 온갖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다. 행여나 자신의 정치 성향에 반하는 내용의 기사라도 썼다면 해당 기자는 태어나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모욕까지 감내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열정을 갖고 진실을 쫓는 기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속한 조직의 집단 논리에 젖어 대충 간부 입맛에 맞는 기사를 찾아 쓰는 기자들도 꽤 있다. 아니면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기사 쓰는 “회사원”도 많다. 적어도 내가 다닌 언론사에서 나는 세 부류의 기자들을 다 봐 왔다. 이들 모두를 향해 기레기라고 싸잡아 욕하는 건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기자란 직업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정의가 아닐까. 그렇게 많은 욕을 먹어도 언론은 여전히 시민들 편에 선 워치독이다. 나는 사회가 지금처럼 투명해지기까지 기자의 공은 상당히 컸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들의 역할이 중요할 거라고 믿는다.

같은 보수끼리 왜 괴롭히는 거예요?

김용준 총리 후보자 낙마 동아일보 보도

2013년 1월 종편으로 이직하자마자 나는 신문과 방송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이 반반씩 섞인 인사검증팀에 배속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을 두 달 앞두고 내각을 꾸려나가던 시기였다. 박 전 대통령은 김용준 인수위원장을 정부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채널A를 포함한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김 후보자에 대한 도덕성과 자질에 대해 검증했고 취재 경쟁은 치열했다. 채널A와 동아일보는 김용준 후보의 땅 투기 의혹과 장남 병역 면제 의혹을 집중 보도했다. 결국 김 후보자는 총리 지명 닷새 만에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채널A-동아일보는 다른 언론사들을 제치고 김용준 후보자 검증으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종합편성채널의 최초 수상이었다. 당시 MBC 출신의 이상호 기자 역시 고발뉴스 트위터를 통해 채널A의 수상 소식을 전했다.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장남 병역 면제 의혹 채널A 보도

취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각 장관 후보자마다 서너 명의 기자들이 달라붙어 그들을 “뒷조사”했다. 나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서승환 국토부 장관, 김종훈 미래부 장관 후보자를 맡아 취재했다. 윤병세 당시 장관 후보자를 취재하면서 딸의 이름 석 자만을 갖고 그녀가 한 국내 언론사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회사에 찾아가 그녀를 직접 만났고 이후 그녀가 대학 재학 중 가계곤란 장학금을 받은 것에 대한 기사를 써서 보도했다. 서승환 국토부 장관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서종철 전 국방부 장관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부녀 정권의 부자 장관 임명이란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시장주의학자로 알려진 서 장관이 세종시 건설을 강하게 반대한 전력과 그의 부인이 강남 사교육 시장을 옹호하는 책의 글 일부를 쓴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단독 취재해 보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토균형발전 및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교육 정책기조에 반하는 행적들이었다. 끝으로 김종훈 미래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해외에서 주로 생활한 탓에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 킴’ 이란 그의 미국 이름을 구글에 검색하던 중 그가 CIA 자문위원 출신으로 미국 부시 정권의 안보 전략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안타깝게 간발의 차이로 인터넷 언론에 단독 보도의 기회를 놓쳤었다. 게다가 그가 미국에서 문란한 밤문화 생활을 보냈다는 증언까지 확보했고 채널A를 포함한 다른 언론사들의 보도가 이어지면서 결국 그는 장관 후보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사검증팀장이자 사건팀 캡으로부터 국정원 직원들이 우리 팀원들을 예의주시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런 얘기가 돌 정도로 박근혜 내각에 대한 채널A의 보도는 날 끝이 제대로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청자의 항의도 거셌다. 한창 장관 후보자에 대한 도덕성과 자질 의혹에 대한 보도를 이어나갈 때였다. 사회부 사건팀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데 사무실에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저희가 다 취재하고 확인하고 보도했다니까요. 어떻게 마음대로 기사를 쓰겠어요?”

“네. 네. 고소하세요. 하시면 됩니다. 제 이름요? 채널A 사회부 000기자입니다.”

민원 전화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급기야 내 앞에 놓인 유선전화도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네. 사회부 사건팀 이준영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채널A 맞죠?”

경상도, 특히 경북쪽 사투리가 심하게 배어있는 60대 어르신의 목소리였다. (나는 부산 출신이라 경남과 경북 사투리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다.)

“네. 그런데요.”

“어이. 이 새끼야. 느그 뭔 생각으로 뉴스를 이따위로 만들어!”

“선생님. 진정하시고요.”

“뭐? 진정? 00하고 자빠졌네. 느그가 언론사야? 박근혜 대통령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래? 자꾸 저런 엉터리 기사 내보낼 거야? 내가 느그들 가만 안 둬!”

더 이상 상식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같은 전화기에서 또다시 벨이 울렸다.

“사회부 사건팀 이준영입니다.”

“저 거기 채널A 사회부 맞죠?”

이번엔 30대로 추정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앞서 통화한 어르신과 달리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투였다.

“네. 맞습니다.”

“저기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박근혜 대통령님 왜 이렇게 괴롭혀요? 채널A, 동아일보 다 보수잖아요. 같은 보수면서 왜 우리 박근혜 대통령님을 못살게 구는 거예요? 내가 일부러 채널A 챙겨보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보겠네요. 언론이 사실대로 보도해야지. 뉴스를 이렇게 왜곡해서 만들면 어떡해요?”

“어떤 보도를 보도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방송하는 내용들 전부 다요. 장관 후보자들 비리 이거 전부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저희가 다 취재해서 사실관계 전부 확인하고 쓴 기사예요. 여기도 언론사인데 없는 얘기 지어내서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 저 앵커가 하는 얘기는 뭐예요? 다 거짓말이잖아요!”

그녀는 점점 언성을 높여갔다.

“준영아. 거 웬만하면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 끊어.”

충혈된 눈으로 나를 가엾이 바라보던 임 모 차장 선배가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건팀 선후배들이 모두 하나같이 수화기를 들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 짓고 전화를 끊었다. 기사를 완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항의 전화는 하나같이 보수 성향의 시청자들로부터 걸려왔다. 애초에 진보 성향 시청자들은 보수 채널은 틀지도 않으니 우리가 어떤 보도를 하는 지 전혀 몰랐고 아마도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김용준 후보자를 포함해 장관 후보자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채널A 보도에 대해 말하면 진보와 보수 성향에 관계없이 다들 의아한 표정을 보이며 하나같은 반응이었다.

“채널A가 왜?”

보수 성향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진보 언론을 보지 않을 게 뻔하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된 계기였다. 박근혜 정부 내각 인사검증팀은 합숙하다시피 두 달을 회사에서 보냈다. 자정에 모여 회의하기도 하고 새벽 두시에 퇴근해 여섯시에 출근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몸이 피곤하고 고된 기간이었지만 8년의 기자생활 중에 가장 보람된 시간이었다.

당신이 모르는 언론 이야기

지역 민영방송과 종합편성채널, 그리고 보도전문채널까지 8년 동안 성격이 다른 세 언론사에서 기자란 신분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고 업무 특성상 토일, 주말과 휴일 이틀 가운데 하루는 늘 근무했으니 내 30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업계에서 보낸 셈이다. 두 번의 이직을 거치면서 지원서 혹은 면접관으로부터 들었던 공통된 질문은 회사를 옮기는 이유였다. 산술적으로만 봐도 한 회사에서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을 보낸 건데 누가 봐도 한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춰질 뿐만 아니라 면접관들이 트집 잡거나 공격하기 좋은 질문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난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했고 수십 년간 언론인으로 살아 온 그들에게 그럴싸한 거짓된 대답은 결코 통하지 않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직서를 쓰거나 경력기자 채용 지원서를 쓰기 전 나 자신과 솔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이직하고 싶은 이유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내렸다. 어찌됐든 두 번의 이직 모두 내가 원했던 회사에 들어갔고 실제 근무하지 않은 두 곳의 언론사로부터 최종합격 통보까지 받은 걸 보면 내 대답의 진정성을 면접관들이 인정해 준 듯싶다. 당시 내가 회사를 옮긴 이유는 이 글을 쓰는 이유이자 직접 경험한 한국 언론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상통한다.

YTN 편집부 기자/PD 시절 뉴스 부조 안에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는 민주화됐고 신군부의 언론 탄압은 사라졌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 둘로 나뉜 언론은 균형을 잃고 자본 권력에 휘둘리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언론 자유는 한국 언론의 과제다. 언론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만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8년 밖에 안 되는 짧은 경력으로 언론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냐는 비난도 달게 받겠다. 세월이 20~30년 기자 생활을 한 선배 입장에서 보면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객관성을 잃고 편협해 지거나 업계 논리에 젖을 수 있다. 나름 덜 때 묻은 전직 언론인의 입장에서 본 언론 이야기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여행 그 설렘

솔로 크로스컨트리 비행 중 Cessna 152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돛을 펼쳐 안전한 항구를 떠나 항해하세요. 당신의 항해에 무역풍을 가득 담으세요. 탐험하고, 꿈꾸고, 발견하세요.

100여 년 전 마크 트웨인이 남긴 이 말은 도전과 설렘의 순간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 날 이끌었다. 독서와 사색을 좋아했던 탓에 학창 시절 문예부에서 글을 빌려 솔직한 내 안의 감정을 표현했다. 80년 해직기자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언론인이 되길 원했고 꿈꿨던 방송 기자가 됐다.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세상에 알렸다. 부산역 노숙자와 밤새 소주 마시며 삶의 애환을 달랬다.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스무 살 청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을 땐 분노와 함께 청춘을 져버린 그에게 아픈 연민마저 느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부터 가슴 아픈 속이야기를 들었을 땐 새옹지마를 떠올렸다.

사회부 기자로서의 삶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에 눈 뜨게 했고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넓혔다.

산업부 기자로 공항과 항공사를 출입하면서 항공업계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취재하며 알게 된 조종사들은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그들이 들려준 파일럿이란 직업과 경험담은 하늘을 날며 세상을 여행하는 삶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기자로서 7년 넘게 쌓아온 커리어를 이어갈지, 비행하는 새 삶에 도전할지 고민했다. 답을 찾는 데까지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았다.

10여 년 전 대학 영문학 수업 시간에서 만난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실망과 후회로 삶을 낭비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지가 내겐 더 강렬했다. 나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그곳으로 직접 뛰어들기로 작정하고 1년 동안 먼 여행을 떠났다. 하늘을 날던 어린 소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클리어 프롭

클리어 프롭!

시동을 걸기 직전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외친다. 비행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엔진 작동을 알리는 말이다. 멈춰있던 비행기가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제사의 이륙 허가를 받고 천천히 스로틀을 밀어 파워를 올리면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조종사의 능숙한 조작과 자연의 바람이 만나 1톤에 달하는 육중한 기계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된다.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새처럼 하늘을 날며 내가 살던 동네 곳곳을 내려다보는 꿈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능력 하나면 세상 전부를 다 가진 기분이었다. 잠에서 깨면 눈을 감고 그대로 누운 채 꿈의 잔상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어들었다.

꿈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 미국으로 떠났다. 1년 동안 비행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하면서 미국과 한국의 사업용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내게 남은 건 단순한 손바닥만 한 자격증이 아니다. 길을 걷다가도 눈 감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다 보면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 비행하는 나를 만난다.